해외여행 시행년도, 예전 해외 유학 가고 싶었지만 갈 수가 없었던 이유
난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 75년생이고 대학을 졸업하고 해외여행은 결혼 전에는 자주 갔었는데 결혼하고 삶이 빡빡해지니 해외여행을 갈 일이 많지 않아 간혹 와이프와 2박 4일 패키지여행 같은 걸 해왔다. 뉴스를 보다가 한국이 해외여행이 언제부터 풀렸는지 알게 되면서 예전 일이 생각나서 몇 자 적어 보려고 블로그질을 한다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국민학교때 부터 제일 친한 친구라고 생각한 녀석이 있었는데 우리 집이 이사를 하면서 서로 몸이 멀리 떨어지게 되었고 즐거운 학창 시절이라 친구를 잊고 지내다가 고등학생이 되고 다시 연락이 되었다.
그 친구의 이름은 K라고 하겠다. K는 국민학교때 우리 학교로 전학을 왔었다. 그놈은 미국에서 살다와서 한국말을 잘 못하는 녀석이었다. 내가 반에서 짝이 되고 집도 우리 집이랑 가까워서 내가 그 녀석을 캐어 한듯하다.
그 녀석의 집에 가면 생전 보지도 못했던 것들이 정말 많았다. 제일 눈에 들어온것은 비디오 플레이어, 지금 생각해 보면 비디오 플레이어라는 것을 그때 처음 보았고 그 비디오 플레이어에 테이프를 넣고 영화를 보는 것이 정말 신기했었다. 그때 당시 봤던 영화는 무슨 공포 영화였는데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리고 신기한것은 장난감들.. 미국에서 와서 그런지 상상도 하지 못한 장난감들이 정말 많았다. 그중에 기억나는 것은 방바닥에 고속도로를 깔아 놓고 권총같이 생긴 유선 리모컨의 방아쇠를 당기면 전기가 흘러 고속도로 위의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막 달리는 장난감이었다.(그때 당시 기동순찰대라는 드라마가 유명했었다) 그 외에도 생각이 나지는 않지만 그 녀석 집에서 노는 건 정말 재미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더 자주 갔었고 그 녀석에게 서투른 한국말을 교정해 주는 선생의 역할도 내가 했었다.
고등학생 때 연락이 닿아 다시 한번 주말이면 그 녀석과 어울려 놀았지만 그때 당시 그 녀석과 우리 집의 거리는 버스를 타고 대략 1시간 30분 정도를 가야 될 정도로 거리가 있었다. K는 그 당시 많이 보급이 안된 PC에 빠져 집에서 PC를 가지고 이것저것 놀 때였는데 난 그 당시에 인문계고를 다니고 있어서 공부만 알고 있지 PC니 인터넷이니 이런 거는 잘 몰랐다. 그때가 아마 91,92년 정도였을 거다
어떤 주말 하루에 그 녀석집에 갔더니 PC 통신이라는 걸 하는 것이었다. 천리안 ..ㅋㅋ 지금 생각하면 입에 미소가 떠오른다. 그때 천리안 하이텔 이런 PC 통신이 살짝 PC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큰 유행이었다. 우리도 천리안에 접속해서 그때 당시 인터넷 채팅으로 여자를 꼬시는 번개도 해보고 만나자고 약속하고 갔다가 얼굴 보고 도망가고 하던 생각이 난다.
k가 먼저 컴퓨터에 취미를 붙이고 학원엘 다닌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도 학교 공부 보다는 컴퓨터로 뭔가를 배워야겠다는 생가에 무작정 번화가에 있는 학원엘 들어가서 베이직이며, 코볼, 포츄란 이런 컴퓨터 언어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K가 하루는 대학은 한국에서 못가고 대신 미국으로 들어가야 할 거 같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K가 어릴적 미국에서 한국으로 이민을 다시 와서 다시 미국으로 가는 것이 가능했고 당시 나와 같은 한국 토종 고등학생은 군 문제도 있고 자격이 안돼서 외국으로 갈 수가 없다는 걸 알게 된 그날 저녁 밥상에서 어떻게 해서든 유학 보내달라고 정말 많이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 후 시간은 흘러 흘러 그 녀석은 실리콘 벨리의 한국 넥슨의 미국 서버 관리자를 한다고 이야기를 들었고 머리가 크고 사회 생활을 한참 할 때 한국에 녀석이 들어왔는데 그때 정말 회사도 이야기하고 째고 정말 한 1주일 정도 미친 듯이 놀았던 일들이 아직도 내 주변 친구들(당시 같이 놀았음)과 안주거리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지금 K는 미국에서 결혼해서 자식들 낳고 잘 지내는 것 같다.
그렇다 한국의 예전은 지금과 많이 틀렸다. 나의 와이프도 가장 좋아하는 TV프로그램이 응답하라 시리즈이다. 옛날 향수가 느껴지는 것이 너무 아련하고 그립네요
응답하라1988에서 덕선이(이혜리 분)가 드라마에서 1971년생으로 나온다 1988년에 덕선이는 18세였다. 나보다 4살이 더 많은 내용이다 그런데 나의 시대와 거의 같다고 보면 된다.
요즘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극장엔 "서울의 봄"이라는 영화가 핫하다.
12.12군사반란 1979년도에 발생한 일이다. 전두환이라는 희대의 백정이 천수를 다 누리고 눈을 감은게 열받지만 죽어도 묻힐 묘자리가 없어서 아직 땅속으로 못 간 것으로 위로받는 중이다.
지금은 우리나라가 해외에서 위상이 높다 K-POP, K-콘텐츠, K-food, K-무기 등등 해외여행도 자유롭고 해외 여행 유튜버가 유명해지는 그런 나라이지만 1987에 겨우 해외 관광 여행을 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1980년대 대한민국
1980년대가 어떨 나라라고 생각하는가? 이 글을 젊은 MZ들이 읽는다면 당신의 엄마 아빠가 응팔의 덕선이가 살았던 행복한 세상이라고 생각들 하는가?
위에서도 언급한 "서울의 봄"이라는 군사 쿠데타가 1979년 12월 12일이다. 이른바 12.12 사태 군사 정부의 전두환은 국민들의 또 다른 국민적인 반란을 잠재우고자 여러 가지 당근을 제시한다.
3S 정책이라는 우민화 정책이다.
여기서 우민화 정책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간략히 이야기하겠다. 워낙 개돼지가 많은 나라인지라
우민화 [愚民化 (어리석을 우/ 백성 민/ 될 화)] 말 그대로 백성을 어리석게 만드는 정책인 것이다. 국민들이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국제 관계까지 잘 알지도 못하게 만들고 관심도 없게 만들어 지배하기 쉽게 만드는 정책이란 뜻이다.
국민들이 깨어있고 현명했다면 2024년이 지금 현재 이렇게 까지 시궁창으로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국민의 짐과 현 정부는 대한민국 정치가 일본처럼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고 그렇게 하기 위해 입으로 똥을 싸지르고 있는 걸 알아야 한다. (일본의 국민은 정치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국민이 태반이고 지네 나라 총리가 누구 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머리 좋다는 엘리트계급들이 부정과 비리를 저지르고 지네들 주머니 채울 동안 개돼지 국민들은 아무것도 모르게 만드는 아주 악랄한 정책인 것이다. 그것도 3S라는 3가지 정책이 더 있다.
3S 정책
1S : Screen (스크린)
2S : Sports (스포츠)
3S : Sex (섹쑤)
실제로 정부 기관에서도 삼 S 또는 쓰리 S 정책이라고도 부른다.
1S 스크린
실제 K-무비의 거름이 되긴 되었지.. 스크린 쿼터제라고 들어 보았는가? 할리우드가 판치는 영화판에 우리나라는 극장에서 우리나라 영화 또는 우리나라 독립영화를 의무적으로 1년에 몇 편 이상 강제로 올려야 하는 제도이다. 전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우리나라만 법적으로 명문화해온 규제다. 실제 이 법률은 1967년에 처음 시행 되었는데 SSS가 시작된 1980년대 들어서 한국의 영화 산업이 급속히 발달을 했다. 바로 영화 검열을 파격적으로 느슨하게 해 줬었다. 그리고 한국 에로영화의 최 전성기였다.
이름도 유명한 애마부인이 82년도에 개봉했고 82년도 극장 개봉작 중 국내 영화의 56개 작품 중에 에로영화만 35편이었다.
국민들을 개돼지 만들려면 오락 영화를 걸어 놓은 극장에 가서 웃고 즐기게 만들어야 하니까..
실제 스크린 쿼터제의 수혜를 입은 건 영화 관련 종사자들이다. 배우 감독 스탭 등등
2S 스포츠
1988년 대한민국이 올림픽을 열었다. 그보다 2년 전에는 86 아시안 게임도 개최했었다. 바로 쿠데타를 성공하고 난 후 1981년에 올림픽 개최를 유치했었다. 그리고 프로야구가 언제부터 했는지 아는가? 바로 1982년이고 프로축구 슈퍼리그, 민속씨름, 프로 농구 농구대잔치도 1983년 출범을 했었다. 개인적으로 대한민국이 지역혐오가 있는 이유가 프로리그 그것도 야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1인이다.
3S 섹쑤
난 아직도 통금하던 골목길이 생각이 난다. 1982년에서야 야간 통행금지가 없어지면서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업체들이 성행하기 시작한다. 유흥가가 늘어나자 거기에 기생하는 조직폭력배들도 어마어마하게 늘어났고 아이러니하게도 3S 정책의 효과인지 국민들은 개돼지가 되어서 우리의 선배 동기들이 피를 흘리며 어렵게 이뤄낸 대통령 직선제를 했지만 1212 사태의 공동범죄자인 노태우가 다시 대통령이 되면서 "범죄와의 전쟁"이라는 명분하에 삼청교육대에 강제로 구금해서 무고한 시민까지 불법적인 인권 유린을 자행했다.
제발 당신이 사는 나라의 정치에 관심을 가지기를 바란다. 당신이 숨 쉬는 것도 정치와 연관이 있다. 그리고 제발 투표는 꼭 하길 바란다. 우리 같은 개돼지가 기득권에게 휘두르고 쏠 수 있는 단 한 자루의 칼이고 총이다.
해외여행 이야기를 하려다가 이야기가 산으로 가버렸다.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해외여행은 나이가 45살이 되어서야 해외여행을 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다. 이후 88 서울 올림픽이 개최되던 해에도 겨우 30살이 되어야 해외 여행을 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 되었다.
이때 당시엔 해외를 나가는 이유가 관광이라면 나갈 수가 없었다. 해외로 나가기 위해선 외국에 일하러 가거나 유학 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리고 유학은 아무나 공부하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학교(고등학교)에서 성적이 상위 10%가 되어야 자격이 주어진다. 거기다가 당시 대기업 신입사원의 월급이 20만 원일 때 통장에 200만 원이 있어야 해외로 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해외로 가기 위해서는 반공교육까지 받아야 하고 여권도 1년짜리 단수 여권이라고 1년에 한 번만 해외로 나갔다 올 수 있는 여권이 발급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내가 고등학생이던 92년도가 유학하기 얼마나 힘든 시기인지 알 것이다. 내가 그때 미국으로 유학을 갔으면....... 음....... 아마 총 맞아 하늘나라로 갔을지도....ㅋ
지금이야 대한민국 여권파워가 세계 199개국 중 2위라고는 하지만 정말 불과 1980년대 이야기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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